#34. 드레퓌스 사건.
보통 사람들은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중 하나인 유대인말살정책을 일순위로 놓기도 합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을 싫어했고, 나치당도 이를 적극 수용하여 반유대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고 알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반유대주의가 팽배했습니다. 민족주의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반대급부로 발생한 것이 반유대주의인 것입니다.
반유대주의로 인해 발생한 여러 사건중 프랑스 군부에서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살짝 적어보겠습니다.
- 보불전쟁 이후의 반독일주의:
보불전쟁은 1870년부터 1871년까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프랑스의 열사적인 패배와 파리의 재앙적인 고통은 프랑스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사회에서 독일인에 대한 증오와 반감이 높아지며, 독일인과 독일 문화에 대한 편견과 반대심이 확산되었습니다.
- 유럽에서 팽배한 민족주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적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독립과 국가의 강인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운동은 유럽 여러 국가에서 팽배하며, 이로 인해 이민, 외국인,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러한 반독일주의와 유럽의 민족주의적 운동은 프랑스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반대심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드레퓌스 사건 발생 시점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드레퓌스가 유대인으로서 프랑스 군에서 근무하고 있던 점과 반독일주의적인 의혹이 결합되어 유죄 판결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사건의 개요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 등의 영향으로 큰 사회적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가 간첩 혐의로 무죄를 주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894년 드레퓌스는 프랑스 정보요원이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빼돌린 문서의 필체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외딴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증거 조작과 진술 변조, 반유대주의적인 편견과 편향 등의 요소로 인해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유죄 판결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후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Emile Zola)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 사건이 공론화되었고, 드레퓌스파(재심 요구파)와 반드레퓌스파(재심 반대파)로 나뉘어 내전 수준의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분열을 야기했으며, 사건 이후 프랑스의 군부는 개혁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지식인들의 활동과 용기가 사회적 정의와 진실 규명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또한 프랑스에서 정교분리 정책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고,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e Herzl)의 시오니즘 운동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드레퓌스 사건은 인권유린과 간첩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사건의 진실(진범)
1896년, 사건 발생 이후 약 2년이 지난 후에 프랑스 군경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진범인으로 의심되는 에스테라지 소령을 적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1896년 8월 31일, 피카르 중령은 부부 싸움을 조정하기 위해 에스테라지 소령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집 안에 있는 몇 가지 문서들을 살펴보던 중, 그는 드레퓌스 사건 관련 자료와 유사한 필체를 발견했습니다. 이를 의심한 피카르 중령은 조사를 시작하고, 에스테라지 소령이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피카르 중령은 자세한 조사를 통해 에스테라지 소령이 이전에도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알아냈습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관련 증거를 수집하고, 에스테라지 소령을 체포하였습니다.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린 피카르 중령은 사건의 재조사와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에스테라지 소령은 1898년 1월 10일에 열린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 사건의 전개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 장조레스, 앙리 푸앵카레, 아나톨 프랑스등 수많은 지식인들의 프랑스 정부와 군부에 대한 비판과 세계 언론의 동조에 프랑스 정부는 외죠적 부담이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1899년 고등법원은 재심을 진행할 것을 결정하였고, 드레퓌스는 유배지(악마의 섬)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1899년 9월에 10년형을 받았으나 10일후 대통령이 사면하여 석방. 하지만 복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904년 다시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 대법원에서 드레퓌스의 무죄가 인정되고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육군에 복권되어 소령으로 승진과 훈장도 받았습니다. 잠시 퇴역했던 그는 1차 세계대전에 발발하자 참전하였고, 1935년 지병으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며,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논의를 더욱 활발하게 이끌었습니다. 또한 사건은 프랑스 사회의 변화와 인권의 존중을 위한 노력에 대한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드레퓌스가 무죄를 받은 후 프랑스 사회의 변화
정치적 변화: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에서 정치적인 변화를 촉발시켰습니다. 사건 이후 프랑스 군부는 개혁과 혁신을 강조하는 성향을 보였고, 군사 체제에 대한 비판과 군사기밀의 불투명성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사건은 프랑스에서 국가의 양성평등과 법의 행동 원칙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적인 이념의 확산을 촉진시켰습니다.
법치주의 강화: 드레퓌스 사건은 법치주의와 정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촉발시켰습니다. 사건을 통해 군사 기밀의 불투명성과 재판의 부당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법원과 재판 절차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하는 법률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인권과 정의를 존중하는 법치주의 원칙을 강조하는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인권과 사회정의 강화: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서 인권과 사회정의에 대한 논의를 더욱 활발하게 이끌었습니다. 사건을 통해 잘못된 유죄 판결이 억압과 인권 침해를 초래했음이 드러났고, 이에 대한 사회적인 분노와 요구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평등과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격렬하게 촉진시켰고, 이후 프랑스에서 여러 사회정책과 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계기로 국가는 개혁과 혁신을 추진하고 법치주의와 인권에 대한 가치를 더욱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사회의 발전과 현대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을 촉진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